서문
감독과 작가로 활동하는 샤인과 제피, 글과 영상이라는 창작물을 세상에 계속해서 남기는 두 사람이 약 1년 간 매주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 받은 걸 책으로 퍼냈다. 편지 내용은 가지각색인데 그날 본 청년 고독사 뉴스에 관한 이야기, 우울에 갇힌 이야기, 여행을 갔던 얘기, 학생 때 읽었던 기억에 남는 책 등등 일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, 친한 친구와 주제 없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.
책을 만나게 된 계기
대학 동기와 포항에 글램핑을 다녀오던 차 안에서 이 책을 선물 받았다. 그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책을 선물 해주는 버킷리스트가 있는데 자기가 평소 좋아하던 여행작가가 쓴 책이라고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 세 명에 내가 선정되었다고 한다. 고백을 하듯이 말하는 친구에게 우습게도 난 감동 받았다(ㅋㅋ) 책을 받으면 으레 그렇듯이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 생겼지만 얇은 책에 안심했던 거 같다. 평소에는 잘 읽지 않는 에세이 책이라 조금 더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언젠간은 읽겠지라는 마음으로 감사히 책을 받았다.
이런 저런 걱정들은 그저 기우에 그칠 뿐이었는지 연휴의 아침을 깨워준 이 책은 재밌었다. 둘의 비밀 편지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좋았고 얼굴도 모르는 작가 두 명이 가지고 있는 고뇌라든지 우울이라든지 삶의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다는 게 내가 짐작한 거보다 더욱 값진 경험이었다. 나는 책을 읽을 때 볼펜을 꼭 챙기는데 인상깊었던 문장과 나의 생각들을 그때그때 책에 기입하기 위해서다.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가면 책을 덮고 난 후 다시 한 번 읽으라고 책 모서리를 접어둔다. (책을 상하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억하고 싶은 말이겠지?)
기억에 남았던 페이지
'우리의 단어가 편지가 될 수 있을까?' 에서 책을 접은 건 제피가 대학 면접을 치룰 때 수학과 교수에게 수학이 싫다고 말하면서 당당하게 '세상 모든 일이 수학처럼 하나의 답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'라고 말한 부분이다. 사실 그렇게 엄청난 문장은 아닐 수 있지만 일생일대의 면접에서 그렇게 말한 작가의 대범함(?)과 그 나이의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에 어느 정도 주관이 들어간 거 같아서 멋있었다.
어떤 모양으로 살고 싶어?
또 책에서는 두 친구가 이전에 나눴던 잡담을 담으면서 어느 도형처럼 살고 싶냐는 이야기가 나온다. 한 작가는 원, 다른 사람은 세모로 살고 싶다고 한다. 이 글을 읽고 나는 어떤 도형으로 살고 싶을까에 관해 짧은 고찰을 해봤다. '일단 당장은 원처럼 살고 있긴 한데 ... 그래, 난 별 모양처럼 살고 싶다!'라는 결론을 내렸다. 여러 분야의 두각을 나타내서 멋있게 반짝이는 별 모양의 사람이 되고 싶다. 그런 별모양은 수학적으로 맞을 지 모르지만 삼각형이나 사각형보다는 원처럼 잘 굴러갈 수 있을 거 같다. (아니면 말고)
나에게 24시간이 남았다면?
작가들은 보통 사람들이 많이 나누는(주로 MBTI가 N인 나같은 사람들이) '만약 나에게 하루만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'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. 제피는 24시간 동안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음악을 귀가 터지도록 듣겠지만 춤은 추지 않을 거라고, 샤인은 걱정없이 푹 자겠다고 했다. 나에게 24시간만 남았다면 아마 계속 연락을 돌릴 거 같다. 내가 사랑했던 전 애인들에게 (아마도 특히 첫사랑에게 미안했다고 사랑했다고 주접을 떨 수도), 그리고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는, 이 황망한 삶에 한 품을 내어주었던 나의 소중한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, 마지막으로는 다음 생에도 다시 만나고픈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예전에 찍을 사진들을 꺼내어 보면서 그 순간들이 더없이 행복했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.
책 선물을 정말로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에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. 누군가에게 생각나는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 내가 누군가에게 책을 읽고 감성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사실이 좋았다. 선물 받은 책이 요즘 건조한 나의 삶에 한줄기 빛이 아닌 한움큼의 비로 내려서 기분좋은 축축함으로 연휴를 끝낼 수 있어서 좋았다. 나에게도 이렇게 서간문을 주고 받을 수 있는 N, 100%의 친구가 있으면 재밌을 거 같다고, 나의 하루를 그리고 일상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부담없이 쏟아낼 수 있는 이가 생기는 행운이 찾아오면 좋겠다고, 한 번 새해 소망을 빌어본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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